2010년 4월 27일 화요일

철학과 정신세계로 참 환경운동을 펼친 고 권숙표 박사

대한민국 1세대 환경리더자로 자리매김
등불과 같이 넓은 본마음으로 환경의 지평 열어

지난 2월25일 대한민국 1세대 환경학자이며 철학의 향기를 펼쳤던 권숙표 연세대의대 명예교수가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지난해 종교적 지도자 김수환 추기경의 영면은 정신적 향기를 펼쳐줬던 이 시대의 지도자였다면 권숙표 박사는 환경분야에서 그 터를 닦고 학술과 운동을 병행하면서 환경문제의 메시아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20년 9월29일 태어나 현해탄을 건너가 야마구찌현 현립 구다마쓰 공업학교와 일본 공립 기후약학전문학교를 졸업 42년부터 후생성 후생과학연구소 훈련과에 근무하면서 동경대 의학부 약학과를 졸업하고 해방과 함께 귀국한다.

서울대학교 부설 개성 생약연구소에 근무하던 권박사는 46년 보사부 국립화학연구소 위생화학과 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54년부터는 고급 인력이 부족한 정부는 보사부 산하 중앙화학연구소 물리화학과장도 겸임하게 한다.

겸임을 하던 기간중 미국 마사추셋 주립 위생공학연구소에 교환근무를 한바 있다.

이후 이승만 정권시절인 56년부터 60년까지 보사부 약정국 수급과장, 마약과장, 고등고시 기술과위원등을 역임하고 61년에는 국립보건원 교수교무과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감하고 학자로서의 길로 접어든다.

중대 약대 부교수로 5개월간 재직하다 평생의 직장인 63년 7월 연세대 의대교수로 87년까지 근무하면서 후진 양성과 우리나라 환경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 간다.

고 권숙표박사는 전남에서 태어나 어린날 대학을 졸업할때까지 12년간을 일본에서 보건과 위생학의 지식을 습득한다.

해방이후부터 보사부에서 공직생활을 15년간 활동했고 다시 캠퍼스로 돌아와 정년을 맞은 87년까지 16년간 후학 양성을 해왔다.

그리고 다시 올 2월까지 13년. 노익장은 건재했고 사회환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인간애적 사랑과 문화적 향기를 돋으며 우리나라 환경역사의 줄기 속에 등심처럼 넉넉한 선학자로 살아온 인생으로 평균 14년간의 인생 전환을 시도한 인물이다.


권숙표박사가 걸어온 길

자유당시절과 박정희정권시절까지 권박사의 삶은 보건사회의 중심인물로 의학과 약학 및 위생등의 발전에 전력을 다해온다.

일본에서 배운 학문을 고국으로 옮겨 와 활동했으며 박정희 시절 처음으로 국가적으로 환경(당시는 공해)에 관심을 지닌 시점은 70년대 중반 이후였다.

이 당시 권박사는 연세대학에 국내 최초로 민간 환경공해연구소를 설립한다. 68년이다.

우리나라에서 관과 민을 통틀어 환경과 공해라는 단어로 연구소를 설립한 최초의 인물이다.

정부가 환경이란 단어로 연구소와 부처를 설립한 것이 80년이니 정부보다 12년이 빠른 시기이다.

대학에 둥지를 튼 1960년대부터 70년대 새마을운동과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기를 소망하던 그 시절 수질오염 ,극장의 대기오염, 하천의 수질 등을 연구하고 발표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시대와 비교할 수 없는 매우 어렵고 아득한 장벽에 가려져 있었던 시기이다.

72년에는 서울시내 극장의 공기오염조사를 연구하여 우리나라 대기오염의 실질적 조사로 조명된다. 이 해 공해의 원인과 전망을 학술지에 발표했고 77년에는 합성세제의 문제를 밝혀 기업주들에게는 미운 사람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80년대 발표된 한강수와 도시하수를 중심으로 한 상수오염에 따른 Trihalomethane 생성능력에 관한 연구(Possibility of Trihalomethane ( THM ) Formation by Chlorination in Drinking Water Supply - On the Han River and Tributary Waters -)

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발암물질인 트리할로메탄에 대하여 국내 최초로 문제를 밝히므로서 우리나라 환경학술지식을 앞당겨 주는 리더자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트리할로메탄에 대한 정용교수와 김교붕씨와 함께 한 연구초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지역의 한강원수 6개지점과 지천수 4개지점에서 1987년 3∼5월중 3회에 걸쳐 채수한 시료에 대하여 염소처리 한 후에 20℃에서 24시간 동안 정치시킨 후 THM생성량을 조사하였다. 염소처리시 각각 조건이 THM생성에 미치는 영향을 수질오염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수인시 정수의 THM농도는 평균 7.5∼14.1ppb로 검출되었다. 2. 한강원수에서 염소처리시 THM생성량이 가장 높았던 지점은 조사지점중 가장 하류인 영등포 취수장 부근으로 평균 60.7±3.4ppb였다. 지천수에서는 104.8∼126.4ppb로 한강원수보다 약 2배 정도로 높게 생성되었다. 3. 원수를 염소처리하였을 때 원수의 브롬이온중에서 평균 11.7±5.6%가 bromineted THM으로 전환 되었으며 원수의 브롬이온 농도와 생성된 THM의 브롬농도와는 상관계수 0.82로 유의한 상관관계를 나나냈다.(P<0.01).>

연세대 정년을 2년 앞둔 85년에는 국내 최초로 수질에 대한 전문 학술기관인 한국수질보전학회(현 한국물환경학회)를 태동한다.

초대회장으로 홍순우(서울대)교수를 선임시키고 김원만(당시한양대교수), 한상욱(당시 환경청근무), 이범호(한국종합개발기술공사)씨 등과 부회장으로 활동하다가 2대 회장에 취임 오늘날의 한국물환경학회의 초석을 다진다. 감사로는 조연제씨가 맡았으며 이후 3대 홍사욱, 4대 위인선, 최의소(고려대)씨 등을 거쳐 민경석, 12대 윤주환(고려대), 13대 고광백(연세대)으로 이어져 온다.

국민들에게 공해문제의 위해에 대해 강조하여 경제우선주의였던 당시 정부에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상수도 수원지의 수질 문제 해결을 위해 지자체와 긴밀하게 협조하기도 했다고 전 한국 수질보전학회회장을 지낸바 있는 최의소 교수는 회상 한다.

요즘의 환경운동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 그의 환경운동은 주변 지인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주었다. 다음해인 86년에는 서울대 박중현 교수가 건교부(국토해양부)에 대한상하수도학회를 창립98년까지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99년 중대 김성순 교수로 회장직을 넘겨준 반면 수질보전학 회는 설립시부터 2년마다 회장을 추대하여 선임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 특징이다. 연세대의 환경분야 권위자로 배출시킨 90년대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정용교수가 있으며 현재는 위해성평가의 일인자로 신동천 교수가 활동하고 있다.

권숙표 박사는 70년대 쓴 21세기의 환경전망과 국제적대응이라는 글에서 급증하는 인구와 산업발전은 자원을 소진시키고 자연생태계의 파괴, 환경오염을 가속화 시킨다고 경고한다. 환경오염의 자정능력 상실, 에너지 고갈, 대기오염 기속, 산성우와 방사선물질의 등장,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등의 위기가 가속화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협력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정확히 진단하고 있다.

당시 공해라는 단어로 열거 할 수 있는 대기오염문제, 수질오염문제, 상하수도문제, 위생문제, 환경산업문제 등을 망라한 글로벌적 연구를 활발히 수행했던 분으로 조명되어진다. 이같은 공을 국가가 인정 전두환 시절인 82년 환경문제를 다루던 민간인 최초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게 된다.

92년에는 오늘날의 환경운동연합인 공해운동추방연합의 초대고문으로 활동하고 89년에는 UN으로부터 글로벌 500인 수상자로 선정하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환경전문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권숙표 박사가 해왔던 일들이 ‘국민에게 환경사랑이란 마음의 주춧돌과 아울러 환경운동의 방향도 제시하지 않았나. 요즘에 와서야 생각하게 된다.’ 라는 권숙표박사의 제자인 연세대 정용 교수 등 주변 지인의 말이 권숙표 박사가 걸어 온길을 잘 설명해 준다.

길샘과의 만남 고엽제를 조사하라. 세상은 소통이 되어야 한다. 물은 흘러야 맑아지고 공기는 들꽃 향기를 품어야 독성이 가라 앉는다. 환경은 그렇게 출발하고 막히고 머물고 습하므로서 생기는 자연생태적 병으로 결국 인간이 소통을 하지 않은 원죄이다.

80년대 초반부터 환경에 눈을 뜬 본인으로 당시는 대학의 환경학부나 관련 전문분야가 없었다. 국내에서는 권박사가 설립한 환경공해연구소가 민간기관으로는 물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한국수도연구소(재)가 김순용씨에 의해 설립될 당시 권숙표 박사는 연구소의 고문이면서 자매지 한국수도신문의 자문위원이며 고문으로 활동했다.

당시 환경에 대한 전문지가 없는 상태였고 공해대책이란 전문지와 물을 다루는 수도신문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환경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시기였다. 이후 지금은 페간된 생활환경이라는 주간지가 잠시 발행되기도 했으나 환경보전협회의 기관지등이 기관지 성격을 띠고 발행되던 시절이다.

결국 환경에 대한 해안과 안목을 넓히려면 연세대 권숙표 박사의 환경공해연구소, 시립대 김동민 교수, 한양대 김원만 교수, 서울대 박중현 교수, 서울시 상하수국의 정규용, 건설부의 상하수국박용승, 수자원공사의 윤석길 부사장, 민간인으로는 서울시 출신의 임성기 한미엔텍회장, 신우엔지니어링의 창시자 염병호, 삼양정수의 장학순회장, 서광공작의 김만영 회장, 부덕실업의 김원택 사장, 도화엔지니어링의 김효림 회장과 곽영필 회장, 환경과학원의 유재근 박사 등의 조언과 힘을 빌려야 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전문분야인 물분야에 국한 했다면 권숙표 박사는 수질분야에서부터 위생, 대기오염 등 국제적인 환경문제를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간파하면서 국내 실정에 맞는 우선적인 연구를 병행하면서 문제와 해결점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는 수시로 들락이는 사랑방 역할을 했으며 권박사의 방을 메운 각종 전문서적과 해외 자료들은 환경과 소통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했다.

환경적 측면에서는 수영만 수영장 문제, 서울의 대기질개선 등으로 긴급처방 후 치뤘던 88올림픽이 끝난 직후 권숙표 박사는 본인에게 미국 잡지를 보여주며 숙제를 던져준다. 제목은 미국이 월남전 당시 실행했던 오렌지카운트 작적이란 고엽제의 내막을 밝힌 미국재향군인회의 회의 내용이 담긴 기사였다. 이를 단초로 하여 국내 참전용사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후암동에 기거하고 있는 채명신 장군을 인터뷰 하는 등 1년반의 추적 취재는 결국 우리나라도 고엽제 환자들이 있다는 기사를 5회에 걸쳐 연재하게 되었다.

권박사의 가족은 아들 혁찬(미래와희망산부인과 원장)·혁문(연세대 의대 교수), 딸 경순(피아노 연주가)·경연(조각가)·소봉(권치과의원 의사), 사위 박세원(서울대 음대 교수)·송지헌(방송인)등 주로 의학계와 예술인으로 이뤄져 있다.

동빙고동에 위치한 권박사의 자택(현재는 일산)에는 책과 묵은 집기와 담배연기로 찌든 눅눅한 시골 토담방같은 풍경. 아파트의 내면세계와는 전혀 다른 푸근한 풍경이다. 자녀들이 의학계와 예술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그만큼 환경과 문화, 그리고 정신세계의 창조적 발상의 대전환이 스며든 결과라고 본다.

고인이 된 권숙표 박사와 함께 오랜 시간 우리나라 환경문제를 고심하던 분들로는 노융희 박사, 노재식 박사, 차철환 박사, 원경선 회장, 신응배 박사, 박노경, 박창근 언론인, 홍순우 교수를 비롯한 원로분들과 제자처럼, 친구처럼 한사회의 동반자로 젊은 환경인들을 격려하고 지도하면서 한시대를 개척했다.

공해라는 단어조차 백과사전에서나 어렵게 찾을 수 있었던 60년대 예방의학자로 의술보다 병을 사전에 치유해야 한다는 대원칙으로 환경문제를 조심스럽게 연구하던 대환경학자. 그리고 70년대의 산업화속의 숨겨진 공해를 파해치며 세상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 시절, 그리고 환경문제가 본격화되고 관련 전문부처가 탄생한 80년대의 지도자로, 사회운동과 국민의 정신 및 학계발전을 꾀하던 90년대 그리고 녹색성장을 기조로 새로운 국제적 시각을 펼치는 2000년대를 지켜보면서 조요히 이승을 하직한 고 권숙표 박사.

빈약한 식견으로 감히 권숙표 박사의 깊은 숨소리를 헤아릴 수 없지만 20여년간 권박사의 먼발치에서 감사함과 우리나라의 오늘을 만든 주춧돌이 참으로 튼실함을 다시금 고맙게 생각한다. 고 권숙표 박사와 명확하게 소통하고 있는 점은 끊임없이 내뿜는 담배. 그 담배 내음이 좋다. 그래도 90세까지 장수하셨으니 나의 흡연은 지속되리라.

그리고 한국물환경학회같은 곳에서 권숙표박사의 추모의 글과 특별강연회나 세미나가 개최된다면 세상은 더 아름답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가 깨끗하고 빛나는 넓은 마음을 갖고 있어서 오랜 세월 영원히 변함이 없다.

설사 천개의 해가 일시에 떠 올라도 이 빛보다 밝지 못하다. 이를 본마음이라 하는데 우주도 본마음에 비하면 바다위에 떠 있는 좁쌀하나에 불과하다'라고 성철스님은 말씀하고 있다. 고 권숙표 박사는 그 넓은 그리고 깊은 본마음이 있어 어눌하고 산업화 물결에 파묻힌 이 시대에 밝은 조명으로 환경분야의 빛나는 얼로 잊을 수 없는 어른으로 살다 이승을 떠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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